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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무현과 바보들

어린语邻 2020. 5. 4. 11:04

나는 노무현의 시대를 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 땅의 생명체로 살아있긴 했지만 사실 상 노무현의 시대를 함께 살아낸 시민은 아니다. 나는 독재정권 시대 때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고 잔인한 시절이 조금 흐른 이후에 한국에 태어났다. 정치를 모르고 컸다. 단지 어릴 때, 길거리에 붙은 노무현의 대선 홍보 현수막을 보고 아빠한테 '아빠, 난 저 사람이 맘에 들어, 인상이 아주 선해.' 라고 했던 기억은 선명하다. 아빠가 사람 볼 줄 안다고 웃었고, 옆에 어른들도 덩달아 웃었다. 그것이 노무현에 대한 나의 첫 번째 기억이다. 두번째 기억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교실에서 벌어졌던 작은 논쟁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무슨 건물을 크게 짓는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있었고, 역사&정치 의식이 부재했던 나는 "돈 아깝게 이런걸 왜 짓는담?"이라고 했다가 친구랑 다투었다. 그 친구는 "노무현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데!!"라고 했고, 나는 그 사람이 누구길래 화까지 내는걸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노무현의 시대에 살아있었지만, 살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일상의 권력의 불균형을 발견하고, 정치를 뚜렷하고 적극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세월호 참사가 그 기점이 된다. 그 전에도 이런 저런 '사회참여'로 분류될 법한 일들을 하긴 했지만, 사실 그것은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컸다. 그 때의 경험과 그 때에 만났던 사람들, 마주한 사건들로 인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맞지만, '연민어린 시선'은 분명한 한계가 있기도 하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이렇게 썼다.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연민의 감정을 넘어서, 정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20대가 흐르면서 우리의 현실이 역사에 발을 딛고 있음을 순간 순간 깨달았다. 게다가, 지금의 한국 정치는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의 물결 속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정치인들이 여전히 지금 정치판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더 그 시대를 좀 더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는 꽤나 잘 알고 있지만, 그 시대를 함께 살지 않았기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품고 있었던 질곡들을 몰랐기 때문에. 즉, 좌절이나 절망, 한 줄기의 희망, 도전, 찬란한 마음, 그리고 또 한 번의 절망과 무기력, 이런 감정들. 그 희노애락을 알고 싶어서, 이번 연휴 이 영화를 택해서 보았다.

노사모라는 정치적 결사체의 독특함 (나에게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지역감정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그 때나 지금이나 종부세를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시절은 몇 십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지역감정과 부동산 값을 가지고 노는 정치인과 언론의 행태가 너무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웃기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인터뷰로 채워지는 장면 장면을 흡입되듯 보았고, 영화를 보면서 잠시 노무현의 시대를 살아보았다.

마음이 찌릿하게 남은 두 개의 대사가 생각난다. 하나는 노 전대통령의 말에서 발췌한 것 같았는데, 젊었을 때는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희망이 안보인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노사모 선거인단의 말이었는데, "무엇인가를 하기로 선택한 사람은 그것을 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두려움이 없다. 그걸 알고 선택한 거니까. 근데 진짜 두려운 건, 내가 그걸 하려고 갔을 때,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거. 나 혼자인 거" 라는 말이다. 이 말들에서, 연대와 희망은 함께 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희망을 끝까지 붙잡으려면, 곁에 누군가 같이 걸어줘야한다는 것. 나도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나에게.

 

+) 이 영화는 노무현 정권 시대의 정책적 잘함과 못함을 평가하는 영화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