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삶의 자리의 영광

[책] 사람,장소, 환대 / 김현경 본문

생각하다/리 뷰

[책] 사람,장소, 환대 / 김현경

어린语邻 2018. 8. 30. 10:48





p160.
신자유주의 하에서 모욕은 흔히 굴욕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예고없이 실직을 당할 때, 일한 대가가 터무니없이 적을 때, 아무리 절약해도 반지하 셋방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굴욕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집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치에 따라 (즉 구조의 담지자로서 구조가 명하는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은 매우 예의 바르게, 심지어 미안해하면서 자기들의 입장을 전달하지 않았던가?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식이다. 
 실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굴욕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자존감이 부족한 것이다. 당신은 혹시 어린 시절에 사랑을 충분히 못 받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를 달래주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믿어라! 그리고 당당해져라! 당신이 긍정적일수록 재취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자신의 존엄dignity을 시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존감은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져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저그올)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p195
 증여에 대한 폴라니와 벤느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것은 증여가 내포하는 인정의 차원-증여가 인정을 추구하며, 인정을 통해서 비로소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와 자선단체가 모금을 하여 같은 일을 할 때, 물질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 형편이 넉넉한 사람에게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로 부가 흘러간다. 그래서 폴라니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재분배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행위자들의 입장에서 그 둘은 결코 같지 않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의무이지만, 모금에 참여하는 것은 자발적인 선택이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실업수당이나 생활보조금을 수령하는 것은 권리이지만,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 인권. 애드보커시. 구조화.

기업이 세금을 내서 재분배하는 것과 기업이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것의 차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구조를 만들어, 가난한 자들이 마땅히 사람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교회가 자선사업을 하는 것의 차이.

교회가 탈세하고, 세습하면서
장학회는 만들어서, 장학사업하는 것의 차이. 

마땅히 교육받아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교육받는 것과
내가 선택하고 내가 노력해서 교육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의 차이.
(아무리 후자가 저렴하고 더 많은 다수에게 제공되는 형식을 취한다고 하더라도, 권리로서 교육이 부여되는 것과 개인의 선택과 노력으로 비로소 부여받을 수 있게 되는것의 차이.)

그러나 우리는 '좋은 사람, 기독교인, 기업, 교육 '의 이미지는 채택하고 싶어하나, 그것을 마땅한 권리로서 부여하고 싶지는 않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