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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 나카마사 마사키

어린语邻 2017. 9. 14. 18:06
8월.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 나카마사 마사키

제목/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저자/ 나카마사 마사키
읽게 된 계기 / 잉클링즈 모임 준비

저자정보/ 1963년. 독일 만하임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 지역문화연구 박사과정을 수료. 현재 가나자와대학교 법학부 교수. 문학과 정치, 법 , 역사 등의 영역에서 행동성 높은 언론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인간성에 대하여>를 옮겼고, 저서로는 <법의 공동체> <돈에 '올바름'이 있는가> 등이 있다.



왜 지금 한나 아렌트인가?

p23
'생각하는 주체'라는 자각적 존재를 내던지고 자기들 대신 생각해줄 '지도자'를 열망한다는 것이다.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을 열고 계속 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p24
'정치'(와 '인간')의 본질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특정한 세계관에 의해 선을 향해 치닫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선'에 대해 끊임없이 '토의'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생각이다.

1장. <'악'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_<전체주의의 기원>을 중심으로

p37
그러나 기독교적인 사랑의 정신에 대해 회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약자에 대한 동정을 정치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을 비판한 한나 아렌트는.....
- 더 공부해보고 싶은 부분

p41
'전체주의'는 전근대적 야만의 발현이 아니라 도리어 서구사회의 근대화, 대중의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는 대중민주주의사회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본 것이다

P48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우리'라는 의식을 확인하는 것도 사회의 다양한 차원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P50
<전체주의의 기원>의 제1권 '반유대주의'는 서구 국가가 속속 탄생하면서 '국민국가'가 찾아낸 친근한 '적' 또는 자기편 안에 섞여 있는 '적'이라고 골라낸 것이 '유대인'이었다는 관점에 의거하여 '반유대주의'를 분석한다.

P53
도대체 왜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유대인을 새삼스레 적대시한 것일까?
한나 아렌트는 이 물음을 통해 '동일성'을 추구하는 국민 집단이 자기 주위에서 '이질적인 자'를 찾아내 '동료''에서 분리시켜 굼심력을 강화하려고 하는 '자/타'의 변증법이라는 매커니즘을 이끌어 낸다.

P53
<전체주의의 기원>의 제2권 '제국주의'에서는 '유대인'을 적으로 삼아 형성된 '국민'의식이 19세기 말 제국주의에 의해 더욱 더 확장되고 강해졌음을 지적한다.

P58
이렇게 한나 아렌트는 '타자'와 대비를 통해 강화되는 '동일성'이론이 '국민국가의 형성->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의 발달->제국주의 정책'이라는 현실의 흐름과 어울려 전체주의의 기원이 되었다고 본다.

P59
<전체주의의 기원>의 제3권 '전체주의'에서 한나 아렌트는 '대중사회'의 탄생으로 '국민국가'라는 이념이 쇠퇴한 것이 전체주의의 운동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원자화
-허구의 세계
-대중을 현실의 세계로부터 차단
- 총체적 공상세계
-왜곡

P65 (정리)
 <전체주의의 기원>의 구성에 따라 전체주의의 발생 과정을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정리해두면 다음과 같다. 반유대주의를 통해 전체주의를 위한 서사적 소재가 마련되고, 국민국가의 생성과 제국주의에 의해 대중사회가 성립한다. 그리고 국민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존립 기반이 크게 변동하면서 대중이 동요하기 시작할 때, 대중의 불안을 서사적으로 이용하는 세계관정당과 운동체가 출현한다고 할 수 있다.

P77
-무사유적 인격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완전한 무사유-이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같지 않다-이것이 그가 시대의 가장 악랄한 범죄자 중 한 사람이 된 요인이었다.

P80
두드러지게 이질적인 '타자'와 대비를 통해 '나'와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한다는 것은 실로 한나 아렌트가 <전체주의의의 기원>에서 논의한 그대로 전체주의가 생성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른바 '궁극적인 악'이라 할만한 전체주의를 규탄하려는 '나'와 '우리'의 행위가 전체주의와 닮아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P82
'자유의지를 지니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며 스스로의 이성으로 선을 지향하는 주체'라는 이미지가 현실과 괴리되어 있음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토론1) 왜 전체주의가 '허구'라는 거지? 허구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전체주의는 그냥 전체주의이지, 왜 그걸 허구라고? 그건 우리가 미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 소설, 가짜 이야기지만, 사실/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실과 맞닿아 있어.
- 아렌트는 이걸 허구라고 보고 싶었던 것이야. 전체주의는 '허구'다 ! 
-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고, 유대인은 다 죽여야해, 라는 사상 자체는 허구가 아닌가? 
- 허구를 무엇으로 보는가? -> 개인적인 판단일 것

- 사유를 열~심히 하면 선할 수 있는가? 

2장. <'인간의 본성'은 정말 훌륭할까?>

아렌트- 인간의 세 가지 조건
1) 노동 labor : 인간의 육체가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
2) 작업 work : 인공적 세계 구축. 가구, 기계, 예술작품 같은 작품 work을 만들어내는 활동
3) 행위 action :언어와 몸짓으로 다른 사람(의 정신)에 작용을 가하고 설득하려는 행위. 오직 인간에게서만 가능. 노동과 작업이 기본적으로 개인의 행위로서 반드시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 않고도 수행할 수 있다면, '행위'는 자신과 비슷하게 사고하고 있을 다른 '인격'을 전제하고 거기에 작용을 가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세계'에는 자기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서로의 인격에 영향을 주고받으려는 행동이다. 
 이런 행위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복수성 plurality'이다. 복수성은 사람들 사이에 '사이in-between'라는 공간이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한다. 거리를 설정한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나 동물적 충동 따위에 의해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매개로 인격적으로 상호작용한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하나로 묶는 전체주의는 사람들의 복수성을 삭제함. 





- 복수의 인격
- 서로의 인격에 영향

P96
원자화되어 주위에서 버려졌다는 감정을 품은 사람들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다시 한 번 '하나'로 묶어세우려는 전체주의는 이질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복수의 전망을 갖고 서로 통론하고 관점을 다원화시킬 수 있는 여지, 즉 사이를 부수는 것이나 다름없다.
- 행위의 여지를 없애고
- 복수성을 소멸시키려는 데

P105
자타의 언어공동체를 구별하는 선을 확실하게 긋고, '내부'를 균질화/순수화하고자 한다면 '사물을 보는 관점'의 다양성은 억압당하고 '복수성'은 사멸한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복수성을 탐구

P105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서 '복수성'을 낳는 '행위'를 중시했지만, 어느 환경에서나 '행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행위'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환경


p110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이라고 말함.
그가 말한 '정치'에는 '행위'를 통해 각자가 커뮤니케이션의 기법과 교양을 연마하여 '복수성'을 낳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한층 더 요약해보면 폴리스의 '공적영역'에서 바로 '인간성=인간다움=후마니타스'가 형성된다.

p120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집'이 이미 '경제'의 기본 단위가 아니며, 사회 전체에서 '노동-생산' 체제의 조지고하가 이루어진 것이 폴리스적 '공/사'의 이분법의 해체, 나아가 거기에 의거하여 살아가던 '인간'으로서 행하는 '해우이'의 붕괴로 이어졌다고 한나 아렌트는 보고 있다. 폴리스의 '정치'는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시민'들이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폴리스의 이상이나 시민이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선'에 대해 개방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지만, 근대 시민사회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대신 회의나 토론 등에서 '경제' 운영이 '정치'의 주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근대의 회의를 구성하는 '대표'들은 많은 경우 지역대표, 직업대표, 당파대표 등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대변한다.

p126
 대중사회 속에서 생화에 얽힌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개성, 다각적인 사고법을 잃어가는 현상을 가리켜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이론은 '소외alienation'라고 부른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인 게오르크 루카치는, 나날의 양식을 얻기 위해 기계의 부품처럼 (주체성 없이) 일하는 노동자가 비판적(다각적)으로 사물을 보는 관점을 잃고 비인격화하여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고통에 몰아넣는 현상을 받아들이는 소외 상황을 분석하였다. (물상화의 개념)
'사회적 영역'에서 소외가 심화되고 인간다움을 상실하면서 사람들은 '친밀권' 안에서 '인간'다운 영혼의 만남같은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친밀권'이란 고대적 의미의 '사적 영역'에서 '경제'적 생산기능을 제거하고, 부모자식이나 부부처럼 아주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변모시킨 영역이다.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계'처럼 여겨진다. 
 '친밀권'을 중심으로 현대적 의미의 '프라이버시'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현대의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란 그렇게 편안한 공간에 '호젓이 혼자 있을 권리'를 의미한다. '경제'를 중심으로 한 바깥 세계, 즉 '사회적 영역'의 빡빡한 비인간적 관계에 지친 사람은 '프라이버시' 공간으로 몸을 피해 안락함을 얻으려고 한다.
 '프라이버시'를 본질로 삼는 '친밀권'에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쉼을 구하는 경향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전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흠뻑 빠져든 나머지 공적 영역에서 '행위'할 의욕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점은 힘주어 지적한다. 
 본격적으로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복수성'을 전제로한 활동이 불가결하다고 역설한다.


-------잉클링즈-------

- 활동적인 삶이 관조적인 삶보다 뒤떨어진 것이 아님. 진정한 활동적 삶이란 무사유적 행동이 아닌 철처히 '사유와 더불어 행위 하는 삶' 



3장. <인간은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질까?>

p140
한나 아렌트는 각자의 '자유'가 폴리스적 의미의 '정치'와 한몸을 이룬다고 여긴다. 단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정치'나 '공공선'에 관심을 갖고 '공적 영역'에서 '행위'에 종사해야만 다른 시민들에게 비로서 '자유로운 인격'이라고 인정받게 된다.

'자유'는 바로 '행위'를 통해 산출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공간 속에 존재한다.

p143
'자유 공간'속에서 '행위' 함으로써 사람은 다각적인 시각을 획득하고 타자와 대비를 통해 사물을 보는 자기다운 관점, 자기다움(=아이덴티티)를 형성한다고 본다.

'인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한나 아렌트는 자유 공간을 파괴하고 '복수성'을 쇠퇴시키는 사상에 강하게 저항한다. '

근대적인 '휴머니즘'과 더불어 확대된 생각, 즉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훌륭한 인간성'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선천적으로 훌륭한 인간성'을 전면적으로 '해방'하려 드는 사상은 오히려 '행위'를 쇠퇴시킨다.

p1464
'해방liberty'가 '자유freedom' 자체는 아니다. 한나 아렌트에게 '자유'는 고대 폴리스의 시민들처럼 어떠한 물질적 제약에도 억눌리지 않고 공적 영역에서 '행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질적 결핍 상태 또는 폭력에 의한 억압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이 거기에 만족한 나머지 자신이 송한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에 대한 탐구를 멈추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다'라고 말할 수 없다. '공동선'을 둘러싼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인간'의 본래적인 '자유'가 나타나는 것이이다.


p152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둔감하고 상상력이 빈곤한 자는 정치자가 될 자격이 없다. 막막한 상황에 놓인 약자를 고통에서 구하는 것이야말로 정치다!"라는 의식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인간으로서 응당 지녀야 할 자연스러운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라 보고, 그것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혁명적 '정치'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
-> 한나 아렌트는 그러한 공감의 정치는 토론을 활성화 하거나 관점을 다양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인간적이고 올바른 모습이라고 상요하는 배타적 가치관으로 기울기 쉽다고 본다.

회사가 허락한 노조
박정희가 허락한 민주화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아렌트가 허락한 시민운동

4장.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될까?

아리스토텔레, 관조=이론 > 실천/제작 etc
BUT 아렌트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김, 그러나 관조도 중요하다고 봄.

마르크스의 행위/실천이 의미있다고는 보나, 그것이 공산주의적 삶 '유도'는 좀 노노노!
신천은 사람들이 미리 설정한 목적을 유도하지만,
행위는 다원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토론.

사유. 생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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