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삶의 자리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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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무기력을 반복하는가 / 에리히 프롬

어린语邻 2017. 9. 14. 18:03
제목/ 나는 왜 무기력을 반복하는가

저자/ 에리히 프롬

저자정보 /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가정에ㅔ서 자랐다. (1900-1980)  라이너 풍크라는 에리히 프롬의 마지막 조교가 이 책을 묶었다. 
01. 1968년의 강연 '현대인의 도덕적 책임'
02, 03. <인간의 본성> (에리히 프롬, 라몬 시라우의 공저)의 서론
04. <자유로부터의 도피>
05.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
06. 1937년 <사회 연구 잡지>에 실린 논문 <무력감에 대하여>
07. 1974년의 강연 '정신분석의 임상적 측면'. 1959년의 강연 '창의적 인간'


소감 / 나는 내가 되고싶다. 아주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서론>
p8
그의 자아 경험은 자기 행동이 자신의 의지와 감정, 사고에서 나온다고 느끼는 최면에서 비롯된다.
p9
자아 경험이 집단 암시의 결과인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 경우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자아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p10
하지만 이런 무력감 역시 연출된 현실의 경험 상품들을 통해 활력을 찾으면서 의식에서 추방할 수 있다. 그래서 연출된 삶이 허약함을 보이거나 집단 최면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에야 무력감이 터져 나오는 경우도 많다.
p11
이 책에 실린 에리히 프롬의 글들을 진짜 삶에의 도전을 옹호하는 변론이다

<0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 선생님,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 프롬은, 인간이 삶의 기본 규범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봄. 

p18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p20
사랑이란 그 사랑에 관여한 사람들의 온전함과 현실을 둘 다 보존하는 유일한 형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복종하거나 그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사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사람은-상대에게 복족하는 사람이건 상대를 지배하는 사람이건-자신의 온전함과 독립이라는 인간의 기본 특성을 상실한다.

p23
합리적 권위와 비합리적 권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 공개적 권위와 익명의 권위
- 합리적 권위란, 내가 생각하는 '평등'의 개념과 가까움. 마땅히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갖는 것
- 공개적 권위는 대결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 익명의 권위는 배후에 있음. 오늘날의 익명의 권위는 시장, 여론, 건강한 인간 이성이라고 봄.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 산다'

p26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p28
무엇을 질병으로 불러도 되는지를 주입당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분해서 죽겠다고, 삶이 무의미해서 죽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불면에 시달린다고, 아내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할 수 없어 괴롭다고, 술을 마시고 싶어 미치겠다고, 직장이 불만스럽다고 말한다.

p30
그런데 오늘날에는 평등을 동일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중략) 동등한 권리를 원한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p32
반드시 타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속감', '팀워크'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상은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 자신이나 이웃의 은둔을 참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다.


<0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p45
나는 진보라는 말을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꾸준한 성장으로 이해한다

p47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기에 '자연의 변덕'이다.

p49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지만 생각을 하는 갈대이다

p51
인간은 인간 본질을 생계비 벌이에 투자하고, 대부분 인위적으로 조장된 쉼 없이 증가하는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의 힘을 이용한다. 그러느라 자신이 인간임을 망각할 위험에 처한다. 

<0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p57
5세기에 이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인간을 수단이나 도구로 보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p58
자유롭고 싶은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둘은 -칸트 말대로 - 자기 목적이어야 한다. 수단은 도구이고,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스스로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대상, 사물이 된다.

p60
자기 발의 족쇄를 끊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으며 동굴의 가파른 벽을 기어올라 마침내 정의의 태양을 보겠다는 노력이 없다면 자유가 존재할까?
자유가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자유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p63
우리는 존재를 추구하지 않고 소유를 추구한다. 많은 경우에서 소유가 존재보다 더 강한 현실성을 갖는다

p64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혹은 "복지와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나는 그에 대해 어떤 의견도 피력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한다'는 표현을 이용해 우리는 그 누구도 어떤 것을 실제로 책임지지 않는 무의미한 수다의 세계로 들어선다. 
- 어떠한 것에 대해 모두 자기 자신만의 의견을 갖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엘리트 주의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있다. 

p64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미적인간이란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어서 모든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하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가운데 자신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사람을 말한다. 

p68
초월성을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은 초월성에 도달할 때, 다시 말해 자기중심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나르시시스트처럼 거울 속의 자신만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자신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여기서 초월성 : 자기중심적 자아를 넘어서며, 현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기주의의 감옥에서 자신을 해방시킨다는 점.

p69 <인간의 상호관계>
에드문트 후설은 타인의 실존을 '제2의 자아', 즉 유추 법칙을 통해 접근하여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나'라고 주장한다.

p71
대중이라는 말은 국민 다수가 아니다. 대중은-오르테가가 말했듯-물화된 인간, 대상, 도구,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다.

p71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음. 알고싶다)
현대인들은 인간과 인간의 실질적 소통 가능성에 진지하게 의문을 품는다. 주관적으로는 타인을 향해야 하고 객관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한다는 케르케고르의 사상을 더이상 믿지 않았던 하에데거는 인간과 인간의 거리를 거듭 강조하였다.

p73
요약하자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중략)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투명하다면 타인의 불투명성은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투명해질 것이다.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_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인간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p77
*중간요약 : 관렴론 철학자들은 지적통찰을 통해서만 자아실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봄. 인간의 인격이 본성과 이성으로 분열. 이성은 본성을 억누르고 감시할 수 있다고 주장
하지만 이렇게 인격을 나눈 결과, 인간의 감정과 지적 능력은 제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이성이 자신의 포로가 된 본성을 감시함으로써 스스로 포로가 되었고 그로 인해 인격의 두 측면 -이성과 감정-이 모두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p78
- 자아실현은, '사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의 실현을 통해 되는 것이다. 
모든 감정적 가능성과 지적 가능성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은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적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 활동을 말한다.

p79
예술가만큼이나 객관적인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 혹은 좀 더 훈련할 필요가 있지만 - 예술가와 같은 자발성을 갖춘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런데 예술가들의 처지는 정말 곤란하다. 성공한 예술가의 개성이나 자발성만 존중을 받기 때문이다.  (중략) 이때의 예술가는 혁명가와 비슷한 처지이다. 

p80
어린아이들 역시 자발성의 사례를 제공한다. 아이들에게는 진짜 자기 감정을 느끼고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p80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순간이나마 자신의 자발성을 경험하고 동시에 그 순간을 진정한 행복으로 느낀다. 어떤 풍경이 아름답다고 자발적으로 느낄 때, 고민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틀에 박히지 않은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느꼈을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솟구쳐 오를 때, 그런 순간 우리 모두는 자발적 체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그런 체험이 이렇게 드물지 않게, 세련되게 찾아온다면 인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어렴풋하나마 예감하게 될 것이다.

p81
이런 자발성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사랑이다. (중략) 그 사랑은 개인의 자아를 보존하며,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의 역동적 성격은 분리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개성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에서 탄생하는 양극성에 있다.

p83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뿌리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활동 그 자체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무게중심이 정확히 거꾸로 되어 있다. 우리는 구체적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하는 대신 상품을 팔겠다는 추상적 목적을 위해 생산한다. 모든 유형, 무형의 사물을 돈을 주고 살 수 있고, 돈만 주면 다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여긴다. 우리 개인의 특성과 노력의 성공 또한 돈과 명성, 권력을 위해서 팔 수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무게중심이 창의적 활동이 주는 순간적 만족에서 완제품의 가치로 옮겨간다.
- 교육은 어떠한가? 교육의 인간의 성장이 아니라, 추상적 목적을 향하고 잇는 건가? 혹은그 반대인가??

p84
 자발적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이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개인은 더 이상 고립된 원자가 아니다. 그와 세상은 질서정연한 전체의 부분이 되고, 그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얻게 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도 사라질 것이다. 고립과 좌절 탓에 생긴 회의는 강제적으로, 자동인형처럼 살지 않고 자발적으로 산다면 그 즉시 사라진다. 그는 자신을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느끼며, 삶 자체의 완성만이 삶의 단 하나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p85
'평등'이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식의 평등 개념은 오늘날 인간이 경제적 영역에서 맡는 역할 탓에 생겨났다. 그런 식의 평등 개념은 오늘날 인간이 경제적 영역에서 맡는 역할 탓에 생겨났다. 구매하는 사람과 판매하는 사람의 관계에서는 인격의 구체적인 차이가 배제된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한쪽은 무언가를 팔아야하고 다른 쪽은 그것을 구매할 돈이 있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경제생활에서는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구분이 없다. 하지만 실제 인간으로서의 그들은 서로 다르며 그 특수성의 장려가 개성의 본질이다.

p87 (교육)
 자발적 활동을 억압하여 진정한 개성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침해하는 행위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3-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로르샤흐테스트의 결과를 보면 자발성을 지키려는 아이들의 노력이 아동과 성인 권위자의 주요 갈등 원인이다. A.Hartoch, 1956 참고)

p87 #독창적 #독창성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전에 다른 누구도 해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 생각이 그의 활동, 그의 생각에서 나옸다는 의미임을 강조하고 싶다
- 그러니까, 남이 한적 있냐 없냐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 나로부터 나온 것이냐의 문제.

p90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창의적 사고는 -다른 창의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 감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감정없이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이 이상적인 태도가 되어버렸다. '

p92 #고통
우리 시대는 죽음을 아주 간단하게 부인함으로써 삶의 기본적 측명을 부정한다.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을 삶의 가장 강한 동력으로, 인간적 연대의 토대로, 기쁨과 열정에 강도와 깊이를 선사하는 경험으로 만드는 대신 이런 경험을 억압하라고 강요한다.

p95
오늘 날에는 사실-더 정확히 말해 정보-의 습득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한다. 점점 더 많은 사실들만 기억하면 결국에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비장한 미신을 섬긴다. 상호 연관 없이 이리저리 흩어진 수많은 개별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킨다. 학생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점점 더 많은 사실을 배우는 데 쓰이기 때문에 정작 사고를 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는다. 물론 사실의 습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만으로는 너무 적은 정보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것과 아주 가까운, 독자적 사고의 용기를 앗아가는 또다른 방법은 모든 진리의 상대화이다. 우리 시대의 '진보'사상가들은 진리를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보면서 그것을 탐구하겠다는 사람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한다. 그들은 진라는 철저하게 주관적인 사안이며 취향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중략) 학자는 외과의가 환자를 대하듯 무균의 손으로 사실에 접근해야 한다. 경험주의나 실증주의를 사칭하거나, 항상 구체적 개념을 사용한다고 떠벌리는 상대주의는 사고의 본질적인 매력을 앗아간다. 즉, 사고하는 사람의 소망과 이해를 앗아가는 것이다.

p98
냉소주의와 순진함의 결합은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현대인의 자신의 사고를 하며 결단을 내릴 용기를 잃게 된다.

p100
 한 번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질문이 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그가 원하는 것의 관념을 떠받치는 기틀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릴려 노력한다. 

p102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런 착각은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줄 수 있는 도움은 거기까지다. 

p104
 만족과 낙관론의 무대 뒤편에서 오늘날의 인간은 죽도록 불행하다. 실제로 그는 절망의 끝에 서 있다. 절망의 심정으로 개성이란 것을 붙들고 늘어진다. '다르고' 싶고 어떤 것을 '다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칭찬을 알지 못한다.
- 현대사회가 다름, 독창성에 집착하는 이유!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p112
인기나 시장에서의 성공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수요가 있는 경우 그는 '누군가'이지만 인기가 없으면 그 누구도 아니다. 이렇듯 인격의 성공 여부에 자존감이 달려 있으므로 현대인에게 인기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실생호알에서 남보다 앞서가느냐는 물론이고,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지 혹은 열등감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지도 그 인기에 좌우된다.
--> 그래서 시시한 삶의 자리의 영광. '내'가 되는 것. 상품성이 없고, 다름이 없고, 개성이 없더라도, 그냥 내 삶의 자리의 영광.

p114
추상적 고객으로서 그는 중요하지만 구체적 고객으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p123
그 경우 그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연극이며, 경험과 소망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결합한 결과가 아니다. 

p124
 사람들이 명소를 찾을 때도 실제로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사진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풍경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그들'이 그 명소를 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그 명소의 모사품이다. 어떤 사고의 목격자가 되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신문이 보도를 하게 될 방식대로 그 상황을 보고 듣는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겪은 체험, 직접 본 예술 공연, 직접 참석한 정치 집회를 신문 기사로 접한 후에야 비로소 '실제'로 느낀다.
- 나 자신을 나 자신으로서 느낄 수 있는가?

p127
합리화는 현실로 나아가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소망과 기존 현실을 일치 시키려는 사후의 노력일 뿐이다.

p140
-현대인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 : 마케팅 지향
인간은 자신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사물로 느낀다

p142
자아감은 스스로를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있다>
p156
하지만 짓밟힘을 당하도록 한 사람이 일차적으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 내가 이렇게 결정하면, 아내가 화를 낼 것이고, 저렇게 결정하면 아버지가 화를 낼것이다..하면서서 가장 화낼 걱정을 덜 하는 방향으로 결정함. 그렇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름. 타인에게 짓밟힌다는 생각을 갖지만..

p164
가짜 분주함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비해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것들에게까지 확장되며, 정작 해결해야 할 과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p177
아이는 병자나 노인과 마찬가지로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비록 그 둘에게 적용하는 이데올로기가 정반대지만 말이다. 현대 사회는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 능력에 바탕을 두고 평가한다. 어떤 사람에게 돌아가는 존중의 정도는 그의 경제적 생산력의 정도에 좌우된다. 경제적으로 어떤 잠재력도 없는 사람은 결국 인간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다. 노인을 대하는 태도,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세삼하게 관찰해 보면 아이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똑같은 태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냉혹한 무시부터 과도한 친절과 도움에 이르는 감정의 수위가 바로 그것이다.
- 여자를 향한 과도한 친절과 도움, 아프리카를 향한 과도한 친절과 도움도 같은 맥락일 것.


<0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_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p193
진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p196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p201
원래 평등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위인이며 결코 타인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는 의미이다.

p202
인간은 인간 고유의 이분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안전을 의미하는 과거 상태의 포기를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과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싶은 소망 사이를 항상 이리저리 오간다. 모든 탄생의 행위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놓아버릴 용기, 자궁을 포기하고 엄마의 가슴과 품을 떠나며 엄마의 손을 놓고 마침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만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