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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삶의 자리의 영광

2016-03-17 투명사회_한병철 본문

생각하다/리 뷰

2016-03-17 투명사회_한병철

어린语邻 2016. 3. 23. 00:28

한국어판 서문

  •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 투명성의 폭력
  • 무제한의 자유와 무제한의 커뮤니케이션은 전면적 통제와 감시로 돌변한다

   

긍정사회

  •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 반면 오직 긍정적인 것 사이에서만 뛰어다니는 자는 정신이 없다. 정신은 느리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며 그것을 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투명성의 시스템은 스스로를 가속화하기 위해 모든 부정성을 폐기 처분한다.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기 보다 긍정성 속에서 질주하는 것이다.
  • 사랑은 길들여지고 긍정화되어 소비와 안락의 상투형이 된다. 어떤 상처도 입지 않아야 한다. 고뇌와 정열은 부정성의 형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부정성 없는 향락에 밀려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진, 피로, 우울과 같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장애에 의해 대체된다.
  •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찰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대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더 많은 정보,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은 전체의 근본적인 불명료함을 제거하지 못한다.

   

   

전시사회

  • 전시가치의 관점에서 볼 때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자기 안에 조용히 있는 것, 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더 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물들은 오직 보이는 한에서만 가치를 획득한다.
  • 일반적으로 볼 때, 가시적인 사물들은 어둠이나 침묵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안디ㅏ. 이들은 가시적인 것보다 더 가시적인 것, 즉 외설적인 것 속에서 휘발되어 버린다.
  •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 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못하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 있다.
  •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 굴곡진 구석이 없다. 비심미적이다. 가속화를 위해 복합성을 축소한다. 의미의 커뮤니케이션보다 빠르다. 의미는 느리다.
  •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관련된다.
  •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더미는 '공허에 대한 공포'에서 생겨난다.
  • 투명사회에서는 모든 거리가 마땅히 제거되어야 부정성으로 간주된다.
  • 거리는 자본의 '순환의 가속화' 방해한다.
  • 거리가 없다는 것은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거리의 소멸은 오히려 가까움을 파괴한다. 가까움은 '풍부한 공간' 바탕으로 하는데, 거리의 소멸은 공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 투명성은 모든 것을 탈거리화하여 똑같이 거리가 없는 존재,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명백사회

- 가장 가까운 사람의 경우에도 매력이 유지되려면 그의 일부부은 불명확하고 비가시적이어야 한다. 환상은 쾌락의 경제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전혀 가려지지 않은 대상은 환상을 차단한다. 시각적인 유예가 쾌락을 깊게 하낟. 상상 속의 서사적 우회로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직접적인 향락은 포르노적이다.

- 과도하게 선명하고 뚜렷한 미디어 속의 극사실적 이미지들은 환상을 마비시키고 질식시킨다. 칸트에 따르면 상상력의 바탕은 놀이에 있다. 상상력은 확고하게 한정되지도 않고 분명한 윤곽선도 없는 놀이 공간을 전제한다. 상상력은 선명하지 않은 , 불명확한 것을 필요로 한다. 상상력은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지 않다.

+) 상상력과 창의력의 강조는 그것을 잃어버리게 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 신성한 것은 투명하지 않다. 오히려 신성한 것은 비밀스러운 흐릿함을 특징으로 한다. 도래할 평화의 왕국은 투명사회가 아닐 것이다. 투명성은 평화의 상태가 아니다.

+) 왜 시는 직접 말하지 않고 비유하는가?

-이러한 것들은 비유의 외투로 덮인다. 경건한 신념으로 탐구하는 인간의 이성이 계속 훈련할 있도록, 그리고 그것들이 벗겨져 공개적으로 제시될 무가치하게 보이지 않도록 말이다. 다른 곳에서 쉽게 이해할 있게 드러내놓고 명백하게 말해진 것도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워진다. 너무나 새로워져서 그것을 숨겨진 상태에서 밖으로 끄집어낼 달콤한 맛이 정도다. 그것을 이런 방식으로 숨겨두는 것은 배움의 열의를 가진 사람들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것이 밝혀질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를테면 자기한테 감추어져 있는 것을 뜨겁게 동경하며, 그렇게 동경하던 것을 발견하는 순간 만큼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 감추어져 있다는 부정적 특성은 해석학을 에로티즘으로 만든다.

- 발견과 해독은 벗기는 쾌감을 일으킨다. 반면 정보는 적나라한다.

   

포르노사회

- 따라서 벌거벗음이란 신이 내린 옷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

- 얼굴은 거의 터져버릴 만큼 전시가치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표정이 파괴됨으로써 에로티즘은 본래 진입이 불가능한 영역, 인간의 얼굴에까지 침입한다.

- 읽기가 아니라 전염과 긴장해소가 이들(포르노) 작용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어떤 푼크툼도 없다. 포르노적 이밈지는 속이 비워지면서 스펙터클의 대상이 되고 만다. 프르노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이다.

   

가속사회

- 사르트르에 따르면 몸은 단순한 살의 사실성으로 축소될 외설이 된다.

*행렬 - 서상성이 있다 -이미지가 있다. - 이야기한다.

프로세서 - 서사성이 없다. - 이미지도 없다.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억 - 서사적이다. -역사성이 있다.

저장 -서사적이지 않다. - 역사성이 없다.

- 오늘 기억은 긍정화되어 쓰레기와 데이터의 터미로(중략)..나란히 널려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사가 없다.

- 투명성의 강제는 사물의 향기, 시간의 향기를 제거한다.

- 아름다운 것은 지금 당장의 스펙터클에서 뿜어나오는 현란한 , 혹은 즉각적인 자극이 아니라 고요한 '잔공, 시간이 남긴 인광'이다.

- 사건과 자극의 빠른 교체는 아름다움의 시간과는 거리가 멀다.

- 시간 위기는 가속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분산과 해체에 있다. (시간이 가산적으로 되고, 서사성을 상실하게 .)

- 가속화 자체가 문제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문제의 해결책도 느리게 살기에서는 찾을 없다.

- 느리게 살기는 공허로의 추락을 막을 없다.

   

친밀사회

- 오늘의 세계는 행위와 감정이 재현되고 읽히는 '극장' 아니라 내밀함이 전시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시장'이다. 극장이 '재현' 장소라면, 시장은 '전시' 장소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극적 '재현' 포르노적 전시에 밀려난다.

-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드러냄으로써, 영혼을 노출함으로써 영혼의 투명성에 이를 있다고 믿는다.

- 이러한 디지털 이웃 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 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체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버린다.

-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가지로 표현 형식이다.

- 우울해진 나르시스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친밀성 속에서 익사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와 거리를 두게 해주는 공허와 부재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계사회

-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있다.

-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날 ,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 투명성이 지배하는 곳에서 신뢰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명성이 신뢰를 만듭니다'라는 구호는 사실 '투명성이 신뢰를 철폐합니다' 바뀌어야 한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진다.

- 투명사회는 불신과 의심의 사회, 신뢰가 줄어들기에 통제에 기대려는 사회다.

- 오늘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존경 없이

- 롤랑 바르트는 사적 영역을 "내가 어떤 이미지도 , 어떤 대상도 되지 않는 시공간의 영역"이라고 정의한 있다.

- 손이나 타자기로 공들여 편지를 작성하는 사이에 즉각정긴 흥분은 이미 수그러든다. 반면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을 가능하게 한다.

- 이런 점에서 디지털 매체는 '감정매체'이다.

- 존경심이 형성되는 것은 인격적, 도덕적 가치의 부여를 통해서다. 그래서 전반적인 가치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존경의 문화까지 침식시킨다.

   

격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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