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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동주, (시로 만나는 윤동주 ‘처럼’_김응교_문학동네)

어린语邻 2016. 5. 5. 00:08

 

   

 

윤동주의 시를 원래 좋아하긴 했지만, 김응교 교수님을 만나면서 그와의 만남이 아주 깊어지고야 말았다. 거의 한 달 째 '처럼(김응교_문학동네)'를 잘근잘근 씹어가며 읽고 있다.

   

한 작가의 전 생애를 보여주면서 시를 해석한 책은 처음 읽어본다. 실은 시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나에게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중고등학생 때 억지로 시를 주입했던 그 텁텁함이 다시 생각나는 듯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지가 않다. 윤동주를 정말 사랑하는 한 사람이, 그의 삶과 깊게 조우하며, 그의 고민의 시간들을 같이 위로하며, 써 내려간 탓이겠다…

   

단편적으로 그의 시를 좋아했다면, 이제는 그가 좋아졌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깊게도 그리워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동주가 그립다.

   

동주의 많은 모습이 나랑 닮았다. 영화 '동주'를 친구랑 보러 갔을 때, 정지용의 시집을 송몽규로부터 건네받아 폴짝거리는 동주를 보면서 친구가 속삭인다.

'딱 너다!'

   

고향을 떠난 슬픔, 공간적 정체성에 대한 상실감도 참으로 닮았다. 조선 땅에서는 만주를 그리워하고, 만주에서는 조선 땅을 그리워한다. 우린 늘 그립다. (그와 나를 '우리'라고 칭하다니!)

 

자연물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닮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목이다. 나도 역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늘, 바람, 별, 햇살 같은 것들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곤 했다. 세상에 늘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그리고 기적이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신의 현재 모습과 이 사회의 현 주소, 내가 닿고 싶은 또 다른 나의 모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소외. 그것에서 오는 뼈아픈 괴로움과 부끄러움. 그의 시를 읽으면 나의 마음을 어쩜 이리 잘 써주나 고맙다.

 

투르게네프의 언덕에서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던 그의 망설임 마저도 닮았다. 길을 걷다가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가는 어르신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던 그가, 사랑이 없어서 내어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나의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손 떨리는 일인지, 그것은 나의 것이 아까운 것과는 다른 종류의 떨림임을. 그는 알았다.

 

키에르케고르를 탐독했던 그가 단독자의 개념을 담아낸 시를 썼다는 부분도 그렇다. 나는 키에르케고르를 잘 알지 못했고, 단독자 개념도 몰랐지만, 나는 아주 자주 이런 이미지를 그린다. 드넓은 황야에, 모래바람만 부는데, 그 곳에 내가 서있고 신이 있는 이미지. 그리고 그런 기분. 신과 나와의 독대. 수없이 그런 기분을 느끼곤 했는데, 그게 단독자의 개념이란다.

 

이렇게 많이, 닮았지만, 단연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휘파람을 불며 서성거리는' 그다. 그가 휘파람을 불며 교회 주변을 서성이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교회당 꼭대기의 걸린 십자가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저리도 높은 첨탑과 나의 작음을 경험하고. 들리지 않는 종소리를 기다리며. 휘파람이나 분다. 괴로웠지만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만. 그 '처럼' 되는 것에 대한 떨림. 4연 2행에서 3행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전율. 안타깝게도 그와 나의 닮지 않은 점은 나는 5연의 고백을 할 수가 없다.

   

요즘 그가 나를 위로한다. 나의 기분을, 경험을, 아픔을, 슬픔을, 고민을, 떨림을, 부끄러움을, 이토록 공감해주는 시인이라니. 그가 나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