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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리 뷰

2016-06-07 헤아려 본 슬픔_C.S.Lewis

어린语邻 2016. 6. 25. 01:43

루이스는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좋은 친구에게, 좋은 스승에게 감사하듯, 지금 이 세상에 살지 않더라도, 이런 책을 남겨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시험기간에 복잡한 책을 읽자니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계속 한 켠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루이스의 헤아려본 슬픔을 읽기로 했다. 친구 같은 루이스의 투정 같지만 날카로운 이야기에, 나의 슬픔도 위로가 된다.

   

   

루이스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1898년생 아일랜드 출신이며, 완고한 무신론자로 살다가 1929년 회심한다. 그가 고통에 대해서 쓴 <고통의 문제>는 그가 쓴 첫 변증서이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기도 했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친구들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루이스와 조이는 1950년부터 서로 편지를 주고 받다가 (작가와 독자의 지적인 교류로) 1952년 처음 서로를 만나게 되고, 교류하다가 1956년 조이가 암에 걸리고 쓰러지면서 루이스는 자신이 조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결혼을 한다. 그들은 약4년동안 결혼 생활을 하고 조이는 죽는다. 그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이렇게 글로 적으니 참 딱딱하기만 하다. 둘의 이야기가 담긴 Shadow lands(섀도우 랜드)라는 영화를 보길 바란다.

   

이 책은 루이스가 조이를 잃고 겪은 아픔을 담아낸 책이다. 보통 <고통의 문제>와 <헤아려 본 슬픔> 두 권을 읽어야 루이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는 완전체라고 말하곤 한다. 고통의 문제는 그의 날카로운 첫 변증서이고, 헤아려 본 슬픔은 날카롭기만 한 것처럼 보였던 루이스의 절절한 감정이 담긴, 인간의 'A' Grief observed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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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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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교적인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라고 루이스는 썼다. 왜냐하면 진정한 종교적 위안이란 장밋빛으로 아늑한 것이 아니라 '힘을 싣다'라는 단어 'com-fort'의 원래 의미 그대로 '힘을 돋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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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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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나는 또다시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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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이러한 생각들을 C에게 얘기해 보았다. 그는 똑같은 일이 그리스도에게도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도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문제가 더 쉬워지는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그만둘지도 모르는 위험에 빠져있다는 뜻은 아니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진짜 위험이란, 그분에 대해 이처럼 끔찍한 사실들을 믿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무서워하는 결론은 "그러니 하나님이란 결국 없는 거야"가 아니라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실체인 거야.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인 것이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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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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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목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보는 순간이 왜 하필이면 그것이

우울하게 보이느냔 말이다.

괘종시계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

항상 있었던 어떤 특징이 빠져 나가고 없다.

세상이 이처럼 무미건조하고 남루하고

닳아빠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게 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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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속적인 행복에 기대지 말라고 경고를 받은 바 있었고,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심지어 고난 겪을 것을 약속받은 처지 아니던가. 그것은 예정된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게다가 우리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말을 듣기조차 하였으며,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미리 생각하고 계산해 보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것이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그리고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신이 온전한 인간이 이러한 일로 이만큼이나 달라져야만 하나? 아니,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한 염려가 진정한 것이었다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는 너무도 단순명료하다. 만약 내 집이 일견에 붕괴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카드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을 '계산에 넣고 있었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상상일 뿐이다. 이들을 계산에 넣는 것은 진정한 공감이 아니다. 내가 만일 (내 생각처럼) 세상의 슬픔에 대해 진정으로 염려하였다면, 나 자신에게 슬픔이 닥쳐왔을 때 이처럼 압도되지 않았을 것이다. 상상 속 내 믿음은 '질병 '고통' '죽음' '외로움' 등으로 이름 붙여진 가짜 돈으로 계산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밧줄이 나를 지탱해 줄지 어떨지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그 밧줄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자, 믿고 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게임에 돈을 걸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게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명 이와 같다. 하나님이든 아니든, 선한 신이든 우주의 가학적인 신이든, 영생이든 비존재든, 그에게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진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판돈이 엄청나게 높아져 마침내는 가짜 돈이나 푼돈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순간이 되어서야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한 사태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덜한 상황에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적어도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사람을 머릿속 생각이나 단지 개념적인 믿음으로부터 흔들어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정신을 차리려면 한 대 얻어맞아 멍해져야 한다.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그는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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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수많은 환자들 중 하나였고, 아직까지 치유받지 못한 남녀들이었다. 거기엔 닦아 주어야 할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박박 닦아 내야 할 얼룩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 칼은 더욱더 빛나게 벼려져야 한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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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 나는 그 분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생전 치과에도 안 가 보았단 말인가?

어쨌든 이건 견딜 수 없이 괴롭다. 그러니 실 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그녀 대신에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어떤 일일지라도 견디겠건만."

그러나 이는 아무것도 걸지 않고 하는 말이기에 그 판돈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다. 만약 그 말이 갑작스레 실현된다면, 그 때 처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말을 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일이 허용되기나 할 것인가?

그런 일은 오직 한 분에게만 허용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 분이 대신 행하셨음을 나는 다시금 믿는다. 그분은 우리의 실없는 소리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감히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나는 그리 할 수 있었으며 감히 감당하였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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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를 시험해 보시는 거"에 대해 올바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모르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이 시험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피고석과 증인석, 그리고 재판석에 모두 한꺼번에 앉아 볼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분은 언제나 내 성채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 뿐이었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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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체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울렸던 대목, p79.

"상처로부터 그렇게 빨리 회복하고 있느냐고? 그러나 그 질문은 애매하다. 맹장을 떼어 내는 수술을 한 후 회복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다리를 절단한 후 회복하고 있느냐는 질문은 사뭇 다른 의미이다. 수술이 끝나면 다친 곳이 아물든지 환자가 죽든지 둘 중 하나다. 만약 아문다고 하면 격렬하고 지속적인 고통도 잠잠해 질 것이다. 그는 곧 원기를 회복할 것이며 의족을 하고 쿵쿵거리며 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회복하였으니까.' 그러나 잘린 부위를 통해 평생토록 쿡쿡 쑤시는 고통을 느낄 것이며 상당히 아플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까지나 외다리 사나이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가 그 사실을 잊는 순간은 거의 없다. 목욕할 때나 옷 입을 때, 앉아 있을 때나 다시 일어설 때에도, 심지어는 잠자리에 누웠을 때에도 모든 것이 다를 것이다. 그의 모든 생활방식이 바뀔 것이다. 한 때 당연한 듯 받아들였던 쾌락이나 활동은 , 모두 완전히 지워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의무도 지워진다.

현재 나는 목발 짚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마도 곧 의족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두 다리로 서게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은 더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동시에 부끄러운 느낌도 들고 왠지 불행을 계속 간직하고 조장하며 연장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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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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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의 이미지는 쉽게 거룩한 이미지가 되어 버리며 신성불가침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시간 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스스로 깨버리신다. 그분은 위대한 우상 파괴자이시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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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매혹되면서도 올바로 꿰뚫어 보는 힘을 주며, 그러면서도 환멸을 느끼지 않게 한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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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예수 믿는 자의 고통과 슬픔이라는 이슈는 나에게서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었다. 나의 슬픔과 시대의 아픔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것. 근 몇 개월은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무단히 애를 썼던 것 같다. 당연히, 고통의 문제도 읽어보았다. 루이스스럽게 탁월하지만, 되려 짜증이 나기에 쉬운 책이었다. 그러나 깊-은 슬픔에 빠진 루이스가 무너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쓴 이 '헤아려 본 슬픔'은 달랐다. 고마운 루이스, 나도 이제 나의 슬픔을 헤아려보고, 시대의 아픔도 헤아려 본다.

의족을 하고 걷는 너가 이 땅을 디딛고 살아갈 수 있도록, 손가락이 잘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련다. 너의 부실한 의족을 빤히 쳐다보고 혼자만 걷는 것이 아니라 의족을 차고 걷는 너의 삶에 경탄을 보내며 살고 싶다. 잘린 다리에 의족은 커녕 제대로 된 목발 하나 없는 그에게는 목발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성치 못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훌쩍이는 사람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