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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리 뷰

영광의 무게, C.S.Lewis

어린语邻 2017. 1. 17. 20:03
2017-01-17 
영광의 무게
C.S.Lewis




-   오늘날 선량한 사람 스무 명을 찾아 최고의 미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그중 열아홉은 ‘비이기심Unselfishmenss’라고 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거의 대부분은 ‘사랑’이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소극적인 용어가 적극적인 용어를 대체했습니다. (p.10)

-   신약성경은 자기부인(self-denial)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자기부인 자체를 목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좇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뒤따라오는 바람직한 결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눅 9:23,24)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고 간절히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현대인의 사고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것은 칸트와 스토아 학파의 사상에서 스며든 것이지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복음서가 당당하게 약속하는 보상, 그 엄청난 보상들을 생각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말씀하실 듯 합니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p12)

-   어른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갑자기 기억났습니다. 칭찬받을 때 가식 없이 한껏 기뻐하는 것은 아이(으스대는 아이 말고 착한 아이 말입니다)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은 아이뿐 아니라 개나 말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겸손에 대한 오해 때문에 저는 그 오랜 세월 동안 가장 겸손하고, 가장 천진난만하고, 가장 피조물다운 기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낮은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짐승이 사람 앞에서,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학생이 교사 앞에서,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
전시의 학문

-   (전시에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곤충들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녀석들은 물질적 부와 안전한 보금자리를 먼저 추구했고 그 보상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포위된 도시에서도 수학공리를 내놓고, 사형수 감방에서 형이상항적 논증을 펴고, 교수대를 두고 농담하고, 퀘벡 성채로 진군하면서 새로 지은 시를 토론하고, 테르모필레에서도 머리를 빗었습니다. 이것은 허세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   기독교가 사람들의 일상적 활동을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중략)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활동들, 심지어 가장 비천한 활동들이라도 하나님께 바치면 그분이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   영적 생명과 인간 활동 자체만 놓고 보면, 둘 사이에 본질적인 불화는 없습니다
.
-   (문화란 경박한 행위라는 견해에 대한 답) 우선, 문화 활동이 그 자체로 영적이고 가치 있다는 일부 현대인들의 생각은 거부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청소부와 구두닦이보다 학자와 시인들을 본질적으로 더 기뻐하실까요? 영어의 ‘영적spiritual’이라는 뜻의 단어를 독일어의 ‘정신적geistlich’이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해서 더없이 위함하고 반기독교적인 오류를 끌어들인 사람은 매튜 아널드였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오류를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 버립시다. 베토벤 같은 작곡가의 일과 파출부의 일은 정확히 똑 같은 조건으로, 즉 하나님께 바쳐지고 “주께 하듯” 겸손하게 할 때만 영적인 일이 됩니다.

-   재능을 활용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고, 그 재능이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 더 나아가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성을 기뻐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학자가 한 단계씩 오르며 성공을 거듭할 때마다 이 위험은 더욱 커집니다. 이런 유혹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학문 활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오른쪽 눈을 빼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내부패거리까지 읽고 기간이 되어 반납함.

나중에 뒷 부분을 읽을 수 있겠지-

전시의 학문이 불편한 내용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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