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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삶의 자리의 영광
쉽게 읽는 철학_키에르케고르와 유신론적 실존주의, 단독자 개념 본문
_발표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은 어렵게 보면 어렵지만, 간단히 보면 굉장히 간단합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절망과 불안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깊은 내면의 절망을 겪어보신 경험이 있으시거나 혹시 지금 경험하고 계시다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더 잘 이해가 되실겁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과 불안에 빠져있었던, 슬픈 철학자였지만 동시에 그것을 극복해나갔던 철학자입니다.
1. 삶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는 평생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바로 두 가지 일 때문입니다. 하나는 키에르케고르의 어머니와 결혼한 일입니다. 원래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하녀였는데, 아버지와 혼인한 뒤 두 달 만에 첫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는 이를 강간에 의한어쩔 수 없는 결혼이라 보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 당시 교회법은 재혼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 결혼은 아버지의 두 번째 결혼이었습니다. 교회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두 달 만에 낳은 아기는 키에르케고르의 아버지에게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남깁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젊은 시절 양치기를 할 때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하늘에 대고 신을 저주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이 사건이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재앙'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다고 굳게 믿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무려 여든두 살까지 살았는데, 그 긴 생애 동안 2명의 부인이 죽고, 7남매 중 6명이 죽는 것을 차례로 바라보며 괴로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코펜하겐 대학교의 신학과 학생이던 스물두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경멸하면서 방탕과 절망의 길로 빠져 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한 신의 저주가 자신의 집안과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뒤로 그의 삶에는 항상'죄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이것이 1935년이던 22살 , 키에르케고르가 경험한 이른바 '대지진'입니다.
1937년 24살 때 그는 14살의 소녀 레기나 올센을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행복하고 안정된 삶이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주저하며 물러섭니다. 자신의 집안 내력과 '방탕한' 과거에 비추어 볼 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순결하고 명랑한 올센과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결국 그는 올센과 파혼하고, 베를린으로'도피성 유학'을 떠나 버리고 맙니다. (키에르케고르 30살)
이 사건으로 그는 더욱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한 좌절 속에서 그는 1943년 30살 때부터 12년 동안 쉬지 않고 저작을 발표합니다. 우울하고 절망적인 인생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쓴 책이 35세 때의 『죽음에 이르는 병』(1948)입니다. 이후 시골교회 목사를 꿈꾸었던 그는 부패한 기성교회와 맞서 싸웁니다. 교회가 진정한 기독교 정신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관습과 제도로 굳어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기성교회와의 논쟁에 지쳐있던 그는 42세에 길 위에서 쓰러집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죽음에 이르는 병』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포와전율』 『우수와 불안』 『철학적 단편』 등 40권의 저서와 20권의 유고일기를 남겼습니다.
- 안광복, 『청소년을 위한 철학자 이야기』(신원문화사)에서 발췌·요약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간단히 보여주는 한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상식적으로 바람이 불면 나무가 춤을 추고, 바람이 자면 나무가 잠잠해야 해요. 그런데 윤동주는 거꾸로 생각했어요. 윤동주시인은 바람이 아닌 '나무'가 주체가 되는 풍경을 본거에요. 세상의 중심은 바람이 아니라 '나무'인 거에요. 우주(바람)을 흔드는 것은 실존(나무)인 겁니다. 나무가 오히려 바람을 흔들고 있어요. 이게 키에르케고르의 핵심 사상입니다. 나, 주체성. 단독자 이지요.
-<처럼>김응교 발췌, 정리
2. 진리관(내면성, 주체성)
"진리에 관한 물음이 객관적으로 제기될 때, 진리는 앎의 주체가 이어져 있는 대상으로서 객관적으로 반성된다. 반성되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그가 이어져 있는 대상이 진리라는, 참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이어져 있는 것이 진리, 참된 것이기만 하다면, 주체는 진리 안에 있는 것이다. 진리에 관한 물음이 주체적으로 제기될 때, 개인의 관계는 주체적으로 반성된다. 만일 이 관계의 어떻게가 진리 안에 있기만 하다면, 설령 그가 이렇게 비진리와 이어져 있더라도 개인은 진리안에 있다."
<철학적 조각들 Philosophical Fragmetns> 1845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은 인간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실존 없는 본질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실존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객관성의 세계로부터 주관의 세계로 눈을 돌렸습니다. "주관성이 진리이다"라는 그의 주장은 객관성이 진리의 기준이 되는 서양전통에 있어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어요. 실존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고, 본질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는 동굴 밖의 세상에 대한 것들에 대한 내용이지요.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주관성이란, 우리가 우리의 실존을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사르트르랑 굉장히 맞닿아있지요. 많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보편적'인 진리에 가치를 두었다면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면이며 최고의 도덕적 실재는 개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런 내적 추구에서 오는 주관성은, 우리 내부를 계속해서 깊게 파고들게 되고, 그 안에서 진리, 절대성, 신과 상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진리(과거의 것)이 안전과 확실성을 보장했다면, 실존적 진리인 주관성은 불확실성과 자유를 내포합니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주관성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노력으로 획득해 나가는 것을 지칭하며,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는 능동적인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어려운 말로 하면 '실존적 변증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각성하고, 진리에 대해서 고민하고, 거짓된 지식을 떨쳐버리고, 진정한 진리와 자아 인식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편적(일반적)인 인간이 아닌 '개인'의 정체성과 실존을 재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실존적 변증법'입니다. (전인격적으로 수행하는 질적변증법, 무한성의 정열의 운동, 추상적인 사변가가 아닌, 시공간속에서 무수한 난관과 한계 상황과 싸우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실존자, 나중에 이것이 신 앞에서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이상적인 자아로 나아가는 단독자 개념과 연결됨)
3)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
쉽게 보기 위해서 어린이를 위해서 쓰여진 키에르케고르 책에 있는 만화를 가져왔어요.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의 개념이 가장 잘 담겨있는 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으로 부르는 것은 심리학적인 우울증이 아니라 정신의 균형 내지 내면의 역학의 심각한 붕괴를 의미합니다. 즉, 절망은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이탈이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절망'을 보기 전에 '불안'의 개념을 먼저 잠깐 설명드릴게요.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실존의 근본 기분으로 봅니다. 그는 유한한 개인은 불안과 절망을 피할 수 없다고 보는데, 특히 불안을 원죄의 결과 혹은 원죄의 현존재이며(불안의 개념,99), 원죄로 인해 신을 저버린 세계를 이 세계로 규정하고, 세계는 불안 속에 있다고 주장합니다(189). 그는 불안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의 원죄설화를 채택해요.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에 의해 그것을 따먹을 수도 있다는 자유의 가능성을 부여 받았는데, 그 가능성은 그를 불안하게 한 것입니다. 그 금령을 어긴 결과 죄의 가능성은 정립된 죄가 되었고, 그의 죄는 그의 후손인 인류의 죄를 파생시켰으며, 그 양과 정도를 증폭시켰지요. 그리고 그렇게 정립된 죄는 또 다른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만들었고 그 가능성으로 인해 사람들을 불안의 상태에 있게 한다고 봅니다. 금령을 어길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아담에게 최초로 불안이 생겨났듯이, 모든 인간에게 '가능성'은 불안이 있게 된 조건이 되었습니다. (바로 자유!) 시간성 안 에서 인간은 죽음의 가능성, 악을 행할 가능성, 더 크고 심각한 죄를 저지를 가능성, 그리고 그 밖의 무수한 가능성에 노출되어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189). 그는 인간이 백 퍼센트 건강할 수 없듯이 전혀 불안 속에 있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완전히 건강한 사람이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고 의사가 말할 수 있듯이, 만일 우리도 인간을 잘 알고 있으면 어떤 의미에서는 절망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불안, 알아 볼 용기조차 낼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불안, 그러한 불안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럼 다시 '절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해볼게요.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무한성과 유한성, 시간성과 영원성, 자유와 필연의 종합체로 보았습니다.(그러니까 반대되는 개념들이 다 우리 안에 있는 거에요)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필연성과 가능성, 유한성과 무한성, 몸과 영혼, 과거와 미래의 종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필연성과 가능성 유한성과 무한성은 서로 대립되는 것을 넘어서 모순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는 하나의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무한한 유한함이며 유한하면서도 유한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을 지향합니다. 어찌보면 인간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존재에요. 그렇지만 동시에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이고, 또 각 사람은 자기 자신에 어떻게 연관되는가 또는 자기의 존재를 무엇이라고 인식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종합적인 관계에 속하게 된 것은 신에 의해 정립된 겁니다. 그래서 이 관계는 '자기 자신에 연관되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신과 연관되는 관계에요. 그런데, 이 관계가 분열하고 부서지면서 절망이 시작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떠먹은 다음부터죠.
이 절망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은 동물 이상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병으로부터 치유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이 병에 걸리지 않는 것도, 이 병에 걸려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 것도 모두 불행한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로서의 면모가 깊이 배어 있는 책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l Dφ den]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4. 실존의 3단계!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의 3가지 단계를 제시합니다. 각각의 단계는 적어도 자신의 실존을 찾는 것을 갈망하는 자들입니다. 0단계는 아에 실존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실존의 세가지 단계
1) 미적 단계 : 영원하지 못함
-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단계
- 아름답고 좋은 것만 즐기면서 인생의 만족을 추구하는 단계
- 쾌락의 패러독스 : 쾌락이 만족되는 순간 사람은 또 다시 불만족을 느낌. 사람의 쾌락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음.
- 심미적 단계입니다. 살아가면서 선택하는 기준이 미와 쾌락으로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편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쾌락의 패러독스가 있어요. 쾌락이 만족되는 순간 사람은 또 다시 불만족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지겨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 다른 쾌락을 찾아 끊임없이 옮겨 다닙니다. 계속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해요. 당연히 그럼 삶은 점점 지루해지고 공허해지겠죠? 그리고 인간은 내가 의존하는 것들, (즉, 나에게 기쁨을 주는 외부의 것들)이 사라질 가능성으로 불안해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이 심미적인 단계에서 한 단계를 도약하면 '윤리적 단계'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말해요.
2) 윤리적 단계
- 윤리적 원칙에 따라서만 살아가려는 단계
- 윤리적으로 살면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음
- 윤리적 감수성 : 윤리적인 판단력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정신. 윤리적 감수성이 뛰어난 만큼 완전한 만족을 얻기 힘듦. 아주 작은 실수에도 큰 가책과 고통을 얻기 때문.
- 두 번째 단계, 윤리적 실존의 세계 입니다. 좀 더 인격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면적인 성찰을 하는 단계 입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은 자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망성은 '전적인 자율성'에 있다고 생각해요. 무한성(영원성,가능성)이이란 인간 자신 안에 내재해 있다고 윤리적 자아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임마누엘 칸트는 예수를 '온전한 도덕적 모범'으로 보고 '인간성의 이상'으로 보았어요.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죄책 의식을 갖고 최대한 노력하다 보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윤리적 자아는 스스로 자기를 완벽하게 구성하려고 애씁니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는 어떤 절망이 올까요? 인간은 결코 완벽한 윤리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부분입니다. 애쓰면 애쓸수록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완전한 윤리적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래서 1단계 심미적 단계처럼 윤리적 실존도 결국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키에르케고르는 설명합니다.
3) 종교적 단계
- 신 앞에서 외톨이, 즉 단독자로 선 채 결단을 내리는 단계
-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 자신 홀로 신 앞에 서야 함.
-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 속한 '무리' '대중' 속의 누군가로 살아감. ->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없음
- 신 앞에 홀로 섰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 마지막 단계가 종교적 단계입니다.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그는 '종교적 실존'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절대자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해요. 아브라함은 고민 끝에 순종하기로 하고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바로 이 순간에 주목하여, 헌신하는 그 순간에 종교적 실존이 있다고 봅니다. 윤리적 실존으로는 절대 아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실존에서는 아들의 생명을 절대자에게 맡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실존의 근본에는 신앙이 있어요. 신앙은 윤리적인 합리성을 버리고 비현실적인 부조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무한한 순종(혹은 포기)'의 자세로 헌실 할 때 그 실존이 인간 안에 있는 최고의 '정열'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썼습니다. 즉, 절대자와의 관계에서만 무한성(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좀 거부감과 불편함이 있는데 한 마디 덧붙히자면, 결국 이삭은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절대자는 세상의 윤리의 파괴자가 아니라 그 궁극적인 완성을 추구하죠.
->고통을 피하기 위해 미적 단계로 도망치거나 윤리적 단계로 해결하려고만 한다면 결국 절망이 주는 실존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자신이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싶은 생각을 통해 종교적 단계로 나아가 신 앞에 단독자로 서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그 유명한 '단독자'개념이 등장하는 겁니다.
"외톨이(개인)란, 종교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 시대가… 전 인류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범주다. 나의 과제는 비천한 하인으로서 되도록 많은 사람을 '외톨이'라는 골짜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초대하고 선동하는 일이다. 아무도 외톨이가 되지 않고서는 이 골짜기를 통과할 수 없다" <관점 中>
"그는 자주 고독을 원하는데 고독은 그에게 때로는 호흡하는 필연성과 같은, 때로는 잠자는 필연성과 같은 생명의 필연성이다. 이것이 대다수의 사람들 이상으로 그에게 생명의 필연성이라는 것은 또한 그의 더 깊은 본성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고독에 대한 소망은 인간의 내면에 여전히 정신이 있다는 표시이며, 무슨 정신이 있는지에 대한 척도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한길사.20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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