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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철 학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4장>을 읽고서

어린语邻 2017. 12. 16. 19:39

자유론 4장 사회가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_존 스튜어트 밀

읽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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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의 덕목(self-regarding)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밀은 자유론 4장에서는 어느정도 범위까지 사회가 개인에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자세하게 밝히고,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개인의 권한에 대해 예시를 들어가며 비판한다.

 밀은 개인과 사회는 각각 자신과 특별하게 관계되는 것에 대해 정당한 관리를 갖는다고 밝힌다. (p.143) 다만,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과 공존하기 위한 두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에 직간접적인 처벌을 받아야 하며, 다른 하나는 사회를 방어하거나 사회구성원이 공격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데 필요한 노동과 희생가운데서 자기 몫을 감당해야 하며, 이는 사회가 강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몫은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p.143) 그러면서 4장 전체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하는데 바로 “이 원리는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심 없는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p.144)는 점이다. 이를 통해 그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 여부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확실히 구분한다.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개인적 덕목의 근거는 누구보다 본인이 자기 자신을 가장 아끼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 이슈에 대해서 구경꾼 수준 정도 되는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그 당사자가 가장 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그것이 설령 실패의 결과를 낳더라도 당사자의 뜻을 무시한 채 어떤 일을 강제할 때 발생하는 손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p146) 하지만 그것을 보며 다른 이들이 이런저런 감정-혐오를 포함한-을 품는 것 역시 자유라고 밝힌다. 그는 ‘그를 혐오의 대상 또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경멸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또 적절한 일일 수 있다’(p.147)라고 분명히 밝힌다. 혐오가 적절하다는 말은 나에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향한 혐오…. 게다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당당하게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요즘, 혐오가 혐오를 낳고, 혐오로 인한 범죄가 증가하는 요즘, 밀이 ‘혐오도 자유의 관점에서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4장을 중심으로 밀이 말하는 ‘이런저런 감정’이 무엇일지 좀 더 촘촘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했다. 먼저 밀이 ‘이런저런 감정을 품어도 된다.’라고 말하는 상황과 근거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자질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이런저런 감정을 품을 수 있다. (p.146)

2. 이런저런 감정을 품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p.146)

3. 천박하거나 타락한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취향에 대해서 혐오를 하지 않으면, 그와 반대되는 좋은 자질을 전혀 구비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혐오를 통해 천박하거나 타락하지 않은 자질, 즉 ‘좋은’ 자질을 구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p.147)

4. 다른 사람에 대해 품고 있는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표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별성을 발휘한다는 차원에서 권리이다. (p.147)

5. 심지어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으면, 주의를 주는 것이 권리이며 ‘의무’일 수도 있다. (p.147)

6. 천박하거나 타락한 행위의 예시 (p.148)

- 경솔하고 완고하며 자만심이 강한 사람

- 절제하는 삶과 거리가 먼 사람

- 패가망신으로 이끄는 탐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

- 품격 높은 감성과 지성은 마다하고 동물적인 쾌락만 좇는 사람

7. 천박하거나 타락한 행위를 통해 그 당사자가 고통을 느끼게 되는 지점은, 징계목적이 아니라 그 잘못된 일 자체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p148)


 밀은 사려 깊지 못하고 인간적 존엄을 지니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이 타인들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한 까닭에 비난을 받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p150) 밀이 ‘이런저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라고 말한 상황은 전자에 속한다. 후자는 감정이 넘어서 사회적인 징계가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상황에서는 동정이나 혐오의 대상은 될 수 있지만 노여움이나 분노의 대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p151) 이러한 내용들을 되짚어 보았을 때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로, 밀이 ‘이런저런 감정’을 품어도 괜찮다고 한 대상은 ‘그렇게 행동을 한 존재’이지 그 ‘존재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내가 염려했던 아이 키우는 어머니에 대한 예시를 더 살펴보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에 대한 대표적인 혐오 표현은 ‘맘충’이다. 맘충이란 단어는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지나치게 피해를 끼치는 '무개념 엄마'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저런 감정’을 품어도 되는 것은 그 사람이 한 잘못된 행동이지, 그로 인한 아이 키우는 어머니에 대한 혐오,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으로 확산되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둘째로, 동정이나 혐오의 대상은 괜찮지만, 노여움이나 분노의 대상은 아니라고 말한 것에서 동정, 혐오, 노여움, 분노의 경계에 대한 고민이 든다. 혐오는 괜찮지만 노여움과 분노는 안된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밀의 의미는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에서 머물거나, 간단하게 충고하는 것 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안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하지만 혐오라는 감정은 쉽게 집단화된다. 특히 SNS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혐오의 감정은 더 빠르게 집단화되고, 확산되며, 무시무시한 여론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혐오하거나 쉽게 충고해도 된다’는 말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밀이 ‘이런 혐오는 안된다’고 말하는 영역도 있다. 나는 앞서서 밀이 ‘이런저런 감정’을 품어도 된다고 말했는데 뒤에서 다시 비판하는 부분이 같은 선상에서 연결이 되지 않는다. 밀은 규찰대moral police(p.160)라는 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까지 침범하며 활동영역을 확대해가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그 대표적인 예시로, 자기들과 종교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반감이 깊어지는 경우를 든다. 스페인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에 있어서 ‘신에 대한 불경’을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무섭다고 말한다. 또한 미국에서 소비와 노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그렇다면 이 예시들은 앞서서 ‘이런저런 감정’을 품어도 된다는 것과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이런저런 감정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도덕적 기준이 달라서 상대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적 자유의 침해로 보고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교적인 이유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밀이 앞서 말한 ‘천박하고 타락한 인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도덕적 기준’이 있다는 뜻일까? 

 나는 다른 시민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도 사회나 어떤 공공기관이 전능한 신을 거역하는 짓이라며 특정 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것이 모든 종교적 박해의 출발점이었다는 말에 동의한다. (p.170) 그러나 밀이 혐오해도 된다고 했던 것과 이 말은 공존하기 어렵다. 나는 밀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 개신교도들의 성소수자 반대 집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성소수자 혐오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것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밀이 말했듯, 그러한 비판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더 많은 성소수자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성소수자 처벌과 같은 법안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반대하고 혐오한다면 그럼 그것은 괜찮은 것일까? 혐오의 감정을 품고, 때때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기준이 우리에게 필요한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혐오가 가지고 있는 무게와 사회적인 영향력, 그리고 그 개인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무게와 재생산되는 폭력구조에 대한 고민이 자유라는 논의와 함께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