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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삶의 자리의 영광

장 자크 루소 <에밀>을 읽고서 본문

생각하다/철 학

장 자크 루소 <에밀>을 읽고서

어린语邻 2017. 12. 16. 19:48

장 자크 루소 <에밀>을 읽고서


해당 글은 교육철학 수업 시간에 작성한 글입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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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루소의 <에밀>에서 발췌된 아래의 텍스트를 읽고 다음 질문에 답하라. 1) 아래 문단이 말하는 핵심적 논점이 무엇인가. 2) 이것이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론 전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3) 루소의 이 논점 혹은 논제에 동의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이의 최초의 울음은 부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이의 울음에 주의를 기 

울이지 않으면 그 부탁은 머지않아 명령으로 변한다. 아이는 처음에는 도와달라고 

울지만, 나중에는 시중을 들어달라고 운다. 이처럼 아이는 본래의 연약함 때문에 

우선 타인에게 의존하는 감정이 생기고, 곧이어 지배와 통치의 관념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런 관념은 아이의 욕구에 의해서 생겨난다기보다는 우리가 시중을 들어줌 

으로써 조장되는 관념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원인이 자연에 있지 않은, 도덕적인 결 

과업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들이 갓 때어났을 때부터 아이의 몸짓이나 

울음소리에 숨겨진 의도를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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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음은 아이가 태어나서 최초로 세계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이다. 아이는 자신의 필요를 섬세하게 구분해내어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울음’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에 내지른다. 그것을 읽어내고 반응하는 것은 양육자의 몫이다. 여기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맺는 관계와 다른 양상이 보인다. 보통은 권력, 돈 등을 가진 자 (강한 자)가 어떤 필요에 대해서 덜 가진 자 (혹은 가지지 못한 자, 약한 자)에게 요구하면 약한 자는 그것을 수행해야 한다. 즉, 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자신의 필요를 채우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강한 자는 명령할 수 있는 다양한 표현과 권한을 갖는다. 반면 약한 자는 표현을 박탈당하고 수행해야 할 책임을 갖는다. 강한 자의 명령은 구체적일 수도 있지만, 아이의 울음 못지않게 ‘내질러’ 지는 순간들도 있다. 그것을 눈치껏 이해하고 수행하는 것은 약한 자의 몫이다. 부탁과 명령의 차이는 권력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이다. 발화를 받는 쪽에게 권력이 있을 때 그것은 부탁이 되고, 발화를 내뱉는 쪽에게 권력이 있을 때 그것은 명령이 된다. 이 권력의 무게 중심에 따라서 ‘난 지금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명령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 루소에 의해 설명되는 아이와 양육자의 관계는 독특하다. 인간의 아이는 그 어떤 생명체보다 약하게 태어난다. 양육자의 돌봄이 없이는 당장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 아이가 운다. 아이는 다양한 표현방식도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이의 ‘내지름’은 그것이 부탁 혹은 명령, 둘 중 어떤 것으로 자리 잡기 전에 양육자에게 책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아이의 내지름의 방식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서 그것이 부탁이 되거나 명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권력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지 결정하는 권한이 양육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직 내지를 뿐이다. 아이의 ‘자연적인 필요’ ‘만’ 채워주는 식으로 반응할 때, 아이는 늘 부탁하는 존재- 즉 명령하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반면 아이의 모든 필요에 반응할 때, 아이는 여전히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울음이 명령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루소는 아이에게 자연적으로 필요한 것은 적절하게 제공하되, 아이에게 권력이 옮겨져 명령하는 자-지배자로서의 관념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한다. 루소가 말하는 좋은 삶은 좋은 일과 나쁜 일, 모든 삶의 모양을 의연하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자기가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부탁하고,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지배자의 관념이 생긴 아이는 명령으로 욕구를 해소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이가 세계와 맺은 관계의 양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자연적인 교육은 자연적인 필요에는 정성껏 반응하되, 궁극적으로 양육의 방향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아이 스스로 살아갈 힘-자생력-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소가 말하는 자생력은 단지 닥친 일을 해결하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 능력일까? 그보다 루소의 자생력은 환상에 빠지지 않은 정신상태가 선행된다. 자연을 따르는 정신은 마땅히 필요한 것에 필요를 느낀다. 나는 여기서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이 생각이 나는데, 루소의 관점에서 욕망의 삼각형에 빠져 허우적대는 욕망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자연적인, 진정한 필요와 관계없는 것들을 바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지배-통치의 방식으로 해결되는 경험의 반복은 아이에게 환상이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환상의 울음은 나의 필요가 무엇인지 나조차도 알 수 없게 만들며, 그것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에 파괴적이다.

 그렇다면 내가 앞서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의 부탁-명령 관계와 아이-양육자 관계와 다름을 이야기한 것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여기서 부탁 혹은 명령 사이의 경계를 지어내는 양육자에게 시선을 돌린다. 시선은 권력이다. 양육자는 우는 아이에게 시선을 보내고, 그 울음의 의미를 해석한다. 그 날카로운 시선! 부탁과 명령 사이의 경계를 지어내고, 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이지 않은 것의 경계를 지어낸다. 예를 들어, 아이가 배고파서 운다고 가정해보자. 양육자는 첫째로 아이가 배고파서 우는지 아닌지를 구분 짓고, 둘째로 ‘배고픔’이 자연적인 욕구인지 아닌지 구분 짓는다. 여기서 자연개념은 아이의 내면이 아닌 양육자의 내면에 있다. 그렇다면 드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에 루소가 말한 것처럼 아이를 양육한다면, 앞 단락에서 말한 아이가 이루는 ‘내면의 조화’는 진정 아이 내면의 조화로움인가 아니면 양육자의 자연개념이 전달되어 구성되는 내면의 조화인가?

 나는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이 제시하는 길을 따르라는 루소의 말에 동의한다. ‘자연스러운 것’ 혹은 나의 언어로는 ‘진리스러운 것’은 존재한다. 다만 그 자연스러운 것은 호숫가에 반사되는 빛처럼, 태양이 남기는 그림자처럼 그 흔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 빛을 본 인간, 그 그림자를 본 인간은, 즉 자연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하는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연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발견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의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끝에 가더라도 그 자연-진리는 그 자체로 발견될 수 없을 것 같지만, ‘자연의 맛’을 본 인간은 계속 그것을 찾고자 할 것이며, 마땅히 찾고자 그리고 따르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루소의 자연의 길을 따르자는 말을 동의한다. 다만, 자연이 흔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양육자가 자연의 개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닌, 아이-상대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교감을 통해서 자연의 의미를 발견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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